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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Korean, and live in Japan
[서대문 경교장] 백범 김구선생님 서거장소/일본인남편의 한국 역사공부
2021. 5. 28.
가나자와 거주, 쥬얼리 제작자. 유튜브 채널에서는 일본 도시락 만들기및 가나자와 풍경 기록중입니다. 🍱
[서대문 경교장] 백범 김구선생님 서거장소/일본인남편의 한국 역사공부
- 본 게시글은 경교장 1층부터 천천히 둘러본 순서대로 나열되어있지 않습니다.
임시정부 > 김구선생님 서거장소 > 기타장소 로 나열되어있습니다만 최대한 관람한 곳들은 모두 기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내용 이해에 참고해주세요(때문에 1층과 2층의 이야기 순서가 섞여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의 소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중에서
2021년 , 5월의 오늘 나는 코로나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작년인 2020년 부터 본격으로 시작된 코로나 19로인한 한국과 일본의 왕래가 자유로움을 잃게되고 세계보건기구(WHO)가 마침내 세계적 대유행을 뜻하는 코로나 "펜데믹"을 선언하고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내가 태어난 고국 땅을 못밟은지도 벌써 1년이 지나버린 것입니다. 수년에 한번 고국땅을 밟을까 말까한 분들도 적지 않지만, 반년에 한번이라도 또, 휴가때엔 꼭 여름이든 겨울이든 한국에 방문했던 우리 부부가 코로나 19에 발이 묶여 내내 일본에서 휴일, 휴가를 보내며 한국의 이야기들을 매체 뉴스및 지인들의 소식으로만 전해들을 수 있는것은 참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특히나 한국문화와 음식을 좋아하는 남편역시.
늘 걷던 그길이 그립고, 웃으며 반기던 사람들이 보고싶고. 맛있는 음식과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정 깊은 그 모든것들이 눈과 손에 직접 닿을 순 없어도 머릿속을로 상상속으로 또 꿈속에서나마 접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생각과 상상속이라 더 행복하고 애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100주년을 기념하던 그 해에, 저는 늘 이야기하듯 필연인지 우연인지 일본인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 길에 올랐습니다. 전혀 연이 없었던 일본의 가나자와라는 곳에 그렇게 정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주하기 몇달 전부터는 남편고가 한국의 역사공부와 그 현장의 길에 방문하는 탐방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고국을 떠나 지낼 생각을 하니 , 또한 늘 가슴에 새기고 있는 한일부부라는것에 대한 제 개인적인 막연한 무게가 있었습니다. 일본엔 없는 역사의 기록이있는 이 땅에서 , 배울것은 배우고, 또 눈에 담고 귀로 듣을 수 있는것들은 최대한 기억하자고 말이예요.
때문에 식민지 역사박물관 및 서대문 형무소, 서울역사박물관, 기타 유적지 등을 돌아보며 뒤늦게나마 남편과 역사공부를 함께 하려고 노력했습니다.(이전 초록창 블로그를 봐주셨던 분들은 아마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과거의 그시절, 내가 살아있진 않았었지만, 80년대에 태어나 30수년을 한국에서 나고자라 경험했던 그 수많은 세월속에서도 나의 고국인 대한민국은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참으로도 빠르게 발전해 왔던 것 같습니다. 10대, 20대, 30대 초반까지도 그다지 역사에 뚜렷한 관심이 없었지만, 단지 종로에서 태어나 생활 활동 범위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려있는 창경궁, 덕수궁, 동대문, 숭례문 기타 등등 너무나도 일상생활에 익숙해져있었던 눈앞의 문화재들, 유적지들을 하루에도 수번 수치며 생활한 덕에 그 소중함을. 더 깊게 알고자하는 욕심이 생기기란 그나이 , 그시절엔 아주 많이 부족했었던 것 같습니다.
30대에 정치에 관심이 생기게되면 자연스럽게 역사에 눈을 뜬다라는 말을 실감이라도하듯, 뒤늦게 나랏일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우리나라 현재의 청와대, 더 나아가 경무대, 또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최초 임시정부 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것은 비단 저 한사람만의 일이 아닐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남편과 지난 2019년 연말을 한국에서 보내기위해 한국땅을 밟았던 그때에, 우리가 다녀온곳은 참 여러곳이었습니다. 가나자와에 이주 후 , 윤봉길의사의 일본 암장지를 방문하던 중, 우연히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임정로드 4000km"의 저자 이시자 오마이뉴스의 김기자님께서 위치를 잘 알려주셨던 인연을 계기로, 한국에 갔었던 첫날 저녁, 잠시 짬을 내어 광화문에서 기자님과 남편과 함께 만나 친필 싸인이 담긴 서적을 선물 받기도 했었습니다. 남편은 개인적으로도 뿌듯해하며 이 책에 있는곳을 언젠가 다 가보고싶다 라는 포부를 보여주기도 했죠.
이번 포스팅에서는 조금 뒤늦은 후기를 기록해볼까합니다. 바로 얼마전 저의 일본 생활에 틈새 즐거움을 전달해주는 몇 프로그램중 하나인 꼬꼬무 시즌 2에서 백범 김구선생님이 운명을 달리하신 장소인 경교장 방문기입니다. 이때까지만해도 저는 경교장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역사적인 그 먼 언젠가 존재했던 조금은 신적인 존재라고까지 느껴졌던 말로만 듣던 백범 김구선생님의 존재 뒷편에,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왜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 여행 첫날에 만나뵈었던 김기자님께서 건내주신 책을 보고 , 그곳에 기록된 곳 중에서 우리가 당장에 갈 수 있는 곳을 한번 가보자. 라며 남편과 스케줄을 조금 빼곡하게 채워넣었습니다.
우리의 호텔은 광화문에있었고, 백범 김구선생님이 돌아가신 장소는 바로 1키로미터도 떨어져있지 않은 길 건너편, 도보로도 쉽겍 접근이 가능했던 거리였다라는것을 알고 또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
한국에 살며 20대 초반부터 30대 초중반까지는 많은 시간들을 273버스를 타고 홍대 향하는 길목에서, 광화문 다음의 서울 역사박물관역에서 충정로로 넘어가는 언덕은 음악을 들으며 멍때리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 구간 사이에 이렇게 역사가 뚜렷하게 켜켜이 쌓인 공간이 존재하는것은 저또한 뒤늦게 알게된 편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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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가 넘어서야 이곳에 올수 있었던것의 반성과 30대가 넘어서라도 결국, 꼭, 올 수 있었기애 다행이다 아는 마음가짐으로 다녀오기전까지는 느끼지 못할 역사적인 현장을 시간 되실때 꼭 다녀오시길 추천드린다.라는 말씀을 드리고싶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저의 생각과 더불어 경교장에서 봤던 내용들을 참고하여 경교장에 다녀온 후기를 기록해보겠습니다.
서울 경교장
본래 이름 : 죽첨장(竹添莊)
지정번호 : 사적 제 465호 / 건축년도 : 1938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08(새문안로 29)
종목 :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 129호
2005년 6월13일 서울 사적 제 465호로 승격.
분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수량 및 면적 : 1동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선생님의 숙소이자 환국 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입니다. 얼마전 꼬꼬무를 통해 백범 김구 선생님을 암살한 암살범과 그를 쫓던 분들, 그리고 김구 선생님 관련한 비하인드(?) 이야기까지 , 반가운 곳이 방송에 나와 내심 기쁘기도, 반갑기도, 또 마음 한편으로는 아리기도 했습니다. 2019년의 지난 겨울 남편과 함께 다녀왔던 경교장.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 두었던 사진 폴더들을 오랜만에 열어보고, 아직 업데이트 하지 않았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보아 이렇게 뒤늦게나마 또한번 공부를 하게됩니다.
당시 경교장 이 일대의 명칭이 다케조에마치(죽첨정_竹添町) 이었기때문에 건물 이름이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최창학 소유의 별장) 김구선생님이 경교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정치 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부른 역사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부호 최창학의 주택으로 김구 선생님께서는 1945년 11월 23일 환국하여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저격을 받아 서거할 때까지 3년 7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경교장 명칭은 서대문 부근에 있었던 경교 라는 다리에서 따온 것입니다.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반탁운동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는 등 해방 후 혼란 정국을 수습하였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서거 후 외국 대사관저, 미군시설, 병원등으로 사용되었지만 2005년 사적 제 465호로 지정되곡, 1층과 2층 지하를 원형대로 복원하여 2013년 3월 2일 전시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본 건물은 양옥 주택으로 안정된 비례와 아치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특징입니다. 1930년대 성숙된 건축술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광복 후 김구선생님(1876년~1949년) 한동안 사용하기도 하였는데요, 경교장은 1949년 김구 선생님의 저격 사건이 벌여진 현장이기도해 내부의 부분적인 변형이 있지만 건물의 모습이나 기본적인 형태가 잘 보존되어있어 후손들인 우리들이 그때 그당시의 역사적인 현장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합니다.
경교장은 월요일 휴무날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관람시간 안에 언제나 오픈되어있습니다. 구독자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에는 들어가기 어려웠닥고 하시던데, 현재는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하십니다. 들어가시면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으신 뒤, 입장이 가능하십니다.
어떤 여성분께서, 1층에서 간단히 이곳 경교장을 둘러보는 방법 등을 설명해 주십니다. 1층에 있던 모니터가 달린 공간에서 화면을 잠시 시청하고 우리는 천천히 1층부터 경교장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관람시간
화요일 ~월요일 09:00~18:00
입장은 5시 30분까지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는 개관합니다.
관람료
Free/무료입장.
경교장, 60년만에 제 모습을 찾다.
보존의 목소리가 제기되었다.(1960~198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혼이 담긴 경교장은 1949년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사용되면서 그 존재가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한국 독립당 및 백범 김구 선생 살해진상규명 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김구 암살 진상 규명운동이 시작되었으며 같은 시기 학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과 남북통일운동 등이 재조명 되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와서는 이러한 활동의 근거지인 경교장을 역사적 현장으로써 보존해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82년 7월 1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역사 유적지들이 개발과정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고발하고, 경교장이 고려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되다 (1990~2000)
1990년대에는 한발 더 나아가 경교장을 문화재로 지정해야한다는 시민사회의 보존 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997년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에서 경교장의 문화재 지정을 국회에 청원하는 것을 계기로 국가와 서울시 차원에서 경교장의 제도적인 보존방안이 논의되고, 경교장의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재조명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경교장은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다시 2005년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원형이 복원되다 (2009~2013)
경교장의 역사적 위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공간 복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토대로 2009년, 서울시와 소유주인 삼성생명(강북삼성병원)이 경교장의 건물 복원에 합의하였습니다. 삼성은 경교장 복원을 위하여 건물을 무상으로 제공하였고, 2010년, 내부 병원시설이 완전히 이전되면서 역사적인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원공사는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교장 내부의 천장, 바닥, 벽체 등을 철거하고, 건축 당시의 설계도면과 임시정부 사용 당시의 사진 자료들을 바탕으로 각 실 평면과 의장을 원형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경교장과 함께한 사람들
경교장은 환국한 임시정부의 청사이자,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숙소, 그리고 비서진의 활동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엄항섭(선전부장), 조완구(재무부장), 김상덕(문화부장), 등이 경교장에 머물렀고, 경위대장 윤경빈과 장준하 등 젊은 수행원들은 이들을 경호하고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선전부장(대변인) 엄항섭(1898~1962)은 주로 임시정부의 이념과 정책을 국내외에 홍보하는 선전부 업무를 수행하며, 김구선생과 함께 마지막까지 경교장에 남아 반탁운동과 통일정부 수립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청년 윤경빈(1919~2018), 백정갑(1919~2006), 이영길(1912~1973), 장준하(1918~1975)는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 탈출한 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수행원 자격으로 귀국, 경교장에서 요인 경호 및 비서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선우진(1922~2009)은 광복군 출신으로, 1948년 김구선생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길에 올랐을때에 수행비서로 동행하였으며,
김구선생이 경교장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좌측근에서 보좌하였습니다. 안미생(1914~미상)은 안중근의 조카딸이자 김구선생의 큰 아들 김인의 부인으로, 1945년 3월 충칭에서 남편을 여의고 고국에 돌아와, 경교장에서 김구선생을 보좌하였습니다. 영어에 능통하여 김구선생과 미군정과의 회담 시 통역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반탁 및 여성운동에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경교장에서 이들의 생활은...
한 울타리 안에 살고있던 건물 소유자 최창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고 합니다. 최창학 집안 사람들은 경교장에 수시로 드나들며 최창학의 짐이 잘 있는지 확인하곤 했습니다. 또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김구 주석 서거 당시에는 경교장에 몰려드는 수많은 인파들로 인하여 집과 가구들에 흠집이 생기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경교장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도 결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환국 초기에는 임시정부 환국봉영회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얼마 안가 지원은 곧 끊겼습니다. 김구선생은 겨울에 난방조차 할 수 없어 혜화동 지인의 집에 가서 묵고 아침에 경교장으로 출근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월급이 끊긴 수행원들은 거처를 찾아 하나 둘 경교장을 떠나야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
국호(대한민국), 정부조직(정부,의회), 정치체제(민주공화제)를 이어받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의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사적 염원을 기반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민국"을 표방하면서 수립된 독립운동의 총지도기관입니다. 임시정부는 27년간 상해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긴 세월을 풍찬노숙하면서 국권회복과 항일 전선을 이끌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1919년에 3.1독립선언의 뜻을 모아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세웠음을 분명히 밝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이와함께 연호도 그대로 계승되는데 <대한민국 관보 1호>에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이라 명시한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 이름인 대한민국과 이를 운영하는 정부와 국회라는 조직, 민주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그대로 계승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관보 1호 발행시기를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 밝혔으니, 대한민국의 1년 은 1919년입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제도를 수립하여.......(생략)
-1948년 7월 17일 제정, 시행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
국기(태극기)와 국가(애국가)를 이어받다.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와 국가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태극기는 1882년부터 사용 되었지만, 볍령으로 처음 제정한것은 1942년 임시정부였으며, 1949년 10월, 일부만 고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역시 1940년에 임시정부에서 승인한 이후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라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태극기와 애국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독립선언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립국"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니, 이것이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때까지 27년동안 정부의 조직응ㄹ 유지하면서 민족의 대표기구로써 독립운동을 총괄 지휘하였습니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으로부터 환국하였습니다. 비록 정부로써 승인을 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입국했지만, 임시정부는 물론이고, 우리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는 경꾜장에서 수차례 국무위원회를 개최하면서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완전한 자주독립응ㄹ 위해 신탁통치에 반대하고,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수립을 선포한 대한민국정부 그 법통이 계승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보는 제헌헌법 전문을 통해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밝혀 놓았고,
국호(대한민국),연호(대한민국),국기(태극기),애국가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되돌아본 임시정부 27년 (1919~1945)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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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년 (1919년 / 1년) 3.1 3.1운동(민족대표 33인 명의로 독립선언) 3.17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민국민의회 설립 4.11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임시헌장 공포 4.23 서울에서 한성정부 수립 5.12 김규식,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 제출 7.10 국내의 행정조직망 설치를 위한 임시지방연통제 발표 8.9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 8.25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설립 9.11 제 1차개헌, 대한민국 임시헌장 공포(대통령제 채택) 연해주, 상하이, 한성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 통합(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
대한민국 14년 (1932년) 1.8 이봉창 의사, 일왕 저격 의거 4.29 윤봉길 의사,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5.임시정부 항저우로 이동 |
대한민국 23년 (1941년) 1.1 한국 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에 편입 6.4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위원장 이승만) 11.28 대한민국 건국강령(광복 후 민족국가건설계획)제정 발표 12.10 일본에 선전포고 |
대한민국 2년 (1920년) 6.7 봉오동 전투 10.26 청산리 대첩 |
대한민국 15년 (1933년) 5 김구선생, 남경에서 장개석과 면담 |
대한민국 24년 (1942년) 6.29 국기의 양식을 통일한 국기양식 일치안 공포 7. 조선의 용대, 광복군에 편입 10.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 임시의 정원에 참ㅇ여 |
대한민국 3년 (1921년) 10. 광동호법정부에 신규식을 전권대사로 파견, 손문과 회견하고 임시정부의 사실상 승인과 독립운동 지원 약속을 받음 |
대한민국 16년 (1934년) 2 중국 중앙 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훈련 실시 |
대한민국 25년 (1943년) 5.10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하는 선언문 결의안 등 채택 8. 광복군, 인도,버어마 전선에 공작대 파견, 영국군과 함께 대일 전쟁 수행 12.1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이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자유 독립시킬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의 카이로 선언을 발표 |
대한민국 5년 (1923년) 1.3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 개박(독립운동의 새로운 방안 모색) |
대한민국 17년 (1935년) 7.5 민족혁명당(한국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가 통일하여 결성)창당으로 무정부상태 10. 김구, 이동녕 등이 가흥 남호에서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여 무정부 상태 수습 11. 한국국민당 창당, 임시정부 전장으로 이동 |
대한민국 26년 (1944년) 4 제 5차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 공포하고 주석 김구,부주석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 연합 정부 구성 10.3 국내비밀공작 수행을 위한 국내공작위원회 설치 |
대한민국 7년 (1925년) 3.23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 4.7 제2차개선, 대한민국 임시헌법 공포(대통령제 폐지, 국무령제 채택) 9.24 국무령 이상룡 취임 |
대한민국 19년 (1937년) 7.7 중일전쟁 발발 7.15 군무부 산하에 군사활동을 계획 추진할 군사위원회 설치 8. 한국국민당 , 한국 독립당, 조선혁명당과 미주지역 6개 단체가 임시정부의 옹호유지를 위해 연합하고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
대한민국 27년 (1944년) 2.28 독일에 선전포고 8.7 미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미국전략사무국)책임자 도노반과 국내진공작전 합의 8.15 일본 항복 선언 8.18 광복군 정진대, 미국 OSS와 함께 여의도 비행장 착륙(이범석,장준하,노능서,김준엽) 9.3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과 당면정책 14개조 발표 11.23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 임시정부요인 1진 환국 12.1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외무부장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 2진 환국....⠀⠀⠀ ⠀⠀⠀⠀⠀⠀⠀⠀⠀⠀⠀⠀⠀ ⠀⠀⠀⠀⠀⠀⠀ |
대한민국 8년 (1926년) 7.7국무령 홍진 취임 12.10 임시의정원에서 김구를 국무령에 선임 |
대한민국 20년 (1938년) 7 임시정부 광저우로 이동 10. 임시정부 류저우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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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9년 (1927년) 4.11 제 3차 개헌, 대한민국 임시약헌 공포 (국무령제 폐지, 국무위원회제 채택) |
대한민국 21년 (1939년) 2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결성 8.27 좌우익 8개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7당 통일회 개최 11.11 임시정부에서 추진할 독립운동방략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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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2년 (1930년) 1.25 한국독립당 창당 |
대한민국 22년 (1940년) 5.9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등 3당 통합으로 한국 독립당 결성 9. 임시정부 충칭으로 이동 9.17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고 한국 광복군 창설 10.9 제4차 개헌, 대한민국 임시약헌 공포(국무령제 폐지, 주석제 채택), 주석에 김구선생 선출 12.20 애국가 사용 의결(안익태 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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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보았었던 봉오동 전투 영화가 기억납니다. 대한민국 2년(1920)년의 일이네요.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많은 애국지사들의 국내,외 대일 항전과 국제사회에서의 외교활동, 그리고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광복과 함께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의 후원 하에 귀국을 서두르면서<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임정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 수립방안으로써 당면 정책 14개조를 제시하였습니다.
성명서에는 "임시정부가 최단기간 내에 환국할 것이며, 국내에 들어가 각계 대표들과 과도정권을 세우고, 그 정권에서 정식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앞으로 추진할 당면 정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1945년 11월 23일
일제에 맞서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님과 김규식 선생님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27년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밟게 됩니다. 비록 연합국으로부터 정부로써 승인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환국했지만, 국민들은 임시정부를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국에 바로 들어오지 못했었는데요, 들어와있는 강대국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광복 3개월이 지나서야 김구선생님의 개인자격으로 귀국된 것 입니다.
김구주석의 스테트먼트(성명서)
"27년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와 나의 동사들은 오직 완전히 통일된 독립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조금이라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속이나 물속에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임시정부의 환국 후 주요활동지는 창덕궁, 운현궁 양관, 경교장, 종로구 창신동의 임종상의 집, 그리고 충무로의 한미호텔(이곳 호텔은 이후 신도호텔로 이름이 바뀌고 현재 신한은행 충무로지점이 들어서 있다고합니다.) 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모두 저의 발길이 닿아있는곳인데도, 지금부터 다시 한국에 가게된다면 많이 다른 시선으로, 좀더 신중하게 그 길을 걸어볼 것 같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연보
연도 | 나이 | 주요활동 |
1876.8.29 | 1 |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남 |
1893 | 18 | 동학에 입문 |
1894.11 | 19 | 황해도 동학 농민군 선봉장으로 해주성 공격 |
1896.3.9 | 21 |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 복수를 위해 일본군 스치다를 처단하고 사형이 확정되나, 고종의 특병으로 집행 정지. |
1898.3.21 | 23 | 인천 감옥에서 탈옥, 이후 삼남지방 다니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생활 |
1903 | 28 | 교육,계몽운동 시작 |
1904 | 29 | 최준례와 결혼 |
1911.7.12 | 36 | 신민회 활동과 안악사건으로 15년형 판결 |
1915.8.21 | 40 | 가출옥 |
1918.11 | 43 | 장남 인(仁) 출생 |
1919.3.29 | 44 |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임명 |
1922 | 47 | 임시정부 내무총장 취임. 차남 신(信) 출생 |
1924.1.1 | 49 | 아내 최준례 사망 |
1926 | 51 | 국무령 취임 |
1927 | 52 | 국무위원 취임 |
1930 | 55 | 한국 독립당 창당 |
1932 | 57 | 한인애국단 단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 등 의열투쟁 지휘 |
1933 | 58 | 장개석과 면담하여 낙양군관학교 한인 훈련반 설치 합의 |
1939.4.26 | 64 | 어머니 곽낙원 별세 |
1940.9.17 | 65 | 중국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 창설 |
1940.10 | 65 | 임시정부 주석 취임 |
1941.12.10 | 66 | 일본에 선전포고 |
1942.10.25 | 67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좌우연합 정부 구성 |
1945.3.29 | 70 | 장남 인(仁)사망 |
1945.11~12 | 70 | 환국, 신탁통치 반대 운동 |
1946.10 | 71 | 좌우합작 7원칙 지지성명 발표 |
1947.12 | 72 | 백범일지 출간 |
1948.4.19 | 73 |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위해 북한행 |
1959.6.26 | 74 |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경교장에서 서거. |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었던 제 3전시실. 이곳에서는 1949년 6월 26일 서거 당일의 시간들로 돌아가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을 생생하게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 설명이 맞는것일까요. 김구선생님의 데드 마스크와 벽면에 정면으로 걸려있던 혈의.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색이 많이 바래지 않아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이런 표현 좀 그렇지만, 불과 몇주전 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옅은 붉은 색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김구 선생님께서 당시 입고계셨던 옷으로, 찢어진 왼팔 부분은 아무래도 긴급처치와 같은 상황에서 생긴 상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꼬꼬무 방송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서거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간직하셨던 물품. 그것은 바로 윤봉길 의사와 맞바꾸신 시계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원래는 윤봉길(1908~1932)의사의 시계였지만,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위해 상하이 홍커우 공원으로 떠나던 날 김구선생님의 시계와 맞바꾼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이젠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가 나오면 마음이 정말 많이 뜨거워집니다. 가나자와에 살면서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에 몇차례나 다녀오며 때마다 방문해 꼭인사를 드리고 오게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송에서만 봤던 곳을 제가 어렵지않게 다녀올수 있는 곳에 살고있다는것,
남들은 한번 다녀오려면 여행과같이 바다건너 다녀와야하는 역사적인 곳을 이렇게 같은 지역에 살면서 다녀올수 있다라는것에 조금이라도 더 감사함을 느끼게됩니다. 설날이나 추석이되면 한번씩 다녀오곤 했습니다. 딱히 시댁에도 갈일이 없을때엔 명절엔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 제사는 아니지만 윤봉길 의사 암장지나 과거 가나자와 성 내부에 현재는 공동 화장실로 사용되고있는 건물 앞에 다녀오곤 합니다.(과거 순국하시기 하루전 묵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위치),
김구 선생님의 데드 마스크,
서거 당일 만들어진 마스크입니다 . 저절로 숙연해지는 곳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박범 김구의 삶
동학에 입문하여 구국 운동을 펼치다.
백범 김구 선생님께선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가난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18세인 1893년,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수난에 직면했을 때 동학에 입문하여 황해도 동학농민운동의 선봉장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1896년에는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하여 일본인 스치다를 처단하고 사형이 확정되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기도 합니다. 이때 옥중에서 신지식을 접하면서 개화사상을 키웠으며, 탈옥 후에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열정적으로 애국계몽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지원하셨습니다.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면서 국내외에 큰 반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40년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환국 후의 국가 구상에 전념하셨습니다.
마지막 독립운동 -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하여 헌신한다.
1945년 11월 해방된 조국이 돌아온 김구선생님은 자주 독립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1948년에는 남과 북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이 하나되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하셨습니다. 1949년 6월 26일 민족 통일을 위한 최후의 노력을 전개하던 중 김구선생님께서는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육군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CIC)요원인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비록 비명에 갔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유,민족,통일 조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백범 이상은 오늘날 우리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대한민구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님의 거실(집무실)
김구 선생님이 평상시 공무를 보거나 접견 장소로 사용하셨던 곳입니다. 2층 계단을 올라 좌측 복도로 쭉- 들어오면 끝쪽에 다다르고 공간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방첩대 요원인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여러가지 다른 건물, 용도로 사용하느라 손상이 많이 되어 다시 재현하면서 만들어낸 장소라고 하기에는 왠지 그날 그시간으로 돌아간것 같은 느낌마져 드는 감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배움으로만 접했던 김구 선생님께서 바로 돌아가신 그 자리에 서있다라는것이 역시 현실감각이 제로가 되어버립니다.
1949년 ,
거실 창가 의자에 앉아있다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요원 안두희의
흉탄을 맞아 급서한 백범 김구선생님. 선생님께서 생전에 앉아 업무를 보시던 창가, 그리고 그 책상.
실제 책상은 아니었지만, 그 위치와 사이즈, 실제 사진고가 너무나도 같아 리얼하고 그래서 더 간접적인 생생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무섭고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저 의자에 앉은채 총탄에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생전에 이곳 거실(집무실) 복도 창가에 앉아 휘호를 쓰거나 책을 읽으셨다던 김구 선생님의 모습
여기서 역시나 내가 보고있었던 현실의 그 공간과, 테이블 위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로 흘러나오는 김구 선생님의 생전 모습이 오버랩.
안두희가 총을 쏜 위치에 서보다.
김구선생님의 마지막 숨결을 간직한 역사적 현장, 안두희가 총을 쏜 위치는 바로 사진의 안내판 모형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서서 안두희는 창가 책상에 앉은 김구 선생님을 겨냥해 총을 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그 오랜세월을 왜놈으로부터도 목숨을 지켜오셨던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님이, 같은 민족에게 그렇게 암살을 당하시고 소중한 생을 마무리하게 되실 것 라는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도 믿을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안두희는 오늘내일 할때에 생판 모르는 어떤 버스기사님께 둔기에 맞아 생을 마감하게되는데요. 결국 본인이 저지른 일을 그대로 본인이 당한 꼴이 된 셈입니다. 자신이 지시를 받아 김구 선생님을 살해했다고 자수후에 번복을 하고. 증인석에서도 결국 실어증이 걸렸다는 이유로 손바닥으로 입을 꾹 잠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안두희.
회고록 속의 경교장
김국 서거와 경교장_박창현 "10일간의 경교장" 1949
김구 서거 참극의 날, 6월 26일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이면 의례히 외출을 하는 선생이 이날만은 아침예배가 끝나면서 2층 거실로 들어가 묵상과 독서에 잠기었다.
그러자 오전 10시경 선생은 사람을 염리동에 있는 창암학교(김구선생이 설립자인 금년 2월 무산 아동을 위한 학교)에 보내어 그곳에 교감인 강영희씨를 부르게 하였다. 그것은 이 학교에 풍끔응ㄹ 사게 하려는 것이었다.)
강씨는 그 이틀 전 금요일에도 백범 선생을 만났는데, 그때 선생은 공주에 볼 일이 있어 갔다올 터이니 그때까지 참으라는 분부를 들었었다. 그래서 전언을 받을 강씨는 의아하여 경교장으로 찾아들어왔다. 그러나 그 사이 공연한 일이 시간이 걸리어 경교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45분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때이다. 경교장 대문밖에 다다른 강씨는 뜻하지 않고 연속적인 불길한 총성을 듣게 되었다. 이 찰나에 70평생을 오로지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쳐온 백범 김구 선생은 그 숙원을 이루지도 못한 채 동족인 일개 청년의 손에 영겁의 길로 떠나고 만 것이다.
이 순간부터 침묵 속에 숨어있던 경교장은 온 시민의 온 국민의 시선을 모으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애국자요 혁명가인 백범 선생이 절통한 최후를 마치시다니... 참변이 있자 비보를 접한 시민들 은 경약과 비분의 가슴을 움켜쥐고 경교장으로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다.
고히 잠자듯 선생의 유해가 누워있는 빈소에선 분향도 누누이 쇄도하는 조객들의 곡성이 애끌듯이 쏟아져 나오고 조객 중에는 조소앙 조완구씨 등 선생의 혁명동지들과 정부 요인들의 얼굴도 섞여 경교장은 한끝 비애와 흥분에 쌓여갔다.
박병태씨를 비롯하여 선생의 친근자들도 모여들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선생의 제자들도 모여들었다.
선생의 뜻을 받들던 청년학도들도 모였다. 시민들은 정원에서 흉변을 말하는 유리창의 탄흔을 올려다보며 헤어질줄을 몰랐다.
그러는 가운데 저녁 6시 40분 경교장 상공에 비행기 한대가 나타났다. 군무로 옹진 방면에 있던 상주 신씨(차남)의 귀가였다.뻔연히 알면서도 한시라도 빨리가면 혹시나? 하는 야릇한 아들의 마음이 더욱 조객들의 심흉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30분 후 연속적인 경적과 함께 뻐크 48년 칠흑색 자동차(이것인 신씨가 엄친을 위하여 홍콩에서 사가지고 온 것이었다)가 상주를 태우고 몰아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상주는 신발도 멋지 못하고 빈소로 뛰어 올라가 싸늘한 부친의 시신 앞에 쓰러지듯 엎드려버렸다.
상주를 맞인 경교장은 더욱 구슬프게 더욱 애처롭께 수색에 잠기어갔고 한편 달려온 한독당 원들은 임시 장의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조객 정리 상중 사무에 분망히 이렇듯 참변 초야는 애도속에 저물어 갔다.
이른 아침부터 문이 메어지게 조객들이 찾아들었다. 김뀨식 박사를 비롯하여 김도연, 이윤영씨도 나타났다. 그러나 조문객 중에는 밭을 매다 달려온 발벗은 부인네, 말을 껄다 영전에 읍하려 온 마부들도 섞여 한층 감회 깊은 정경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경교장은 눈부시게 분주하였다. 오전에는 경교장의 김구 선생 조난의 상보가 발표되었다.
한독당 부위원장은 선생의 장의를 동지장으로 할 방침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정부대로 국장을 결정하였다.
오후에는 정부측과 경교장측이 화합하여 결국 국민장으로 하기로 낙착이되고 정식으로 고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위원회가 성립되어
위원장 이하 148명의 장의위원이 발표되었다. 이날 정오 선생의 유해는 이층에서 아래층 동북편 회의실로 모시어 나렸다.
이에 앞서 조각가 박승구씨는 선생의 영구적인 기념이 될 데드마스크의 형을 떠내었다.
조문객은 시간이 갈수록 떼를 지어 찾아들었다.⠀⠀
(사진 :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 주석 서거 후 빈소가 마련된 귀빈 식당)⠀⠀⠀⠀⠀ ⠀⠀⠀⠀⠀⠀⠀
29일 입관식날
노지사의 죽엄응ㄹ 하늘도 애통해하는 듯이 흉극 제4일은 아침부터 얕은 구름 낀 날씨는 지금이라도 곧 비가 내릴 것 같이 보였다.
밀려오는 군중의 이날도 여전히 그 장사진은 경교장에서 전찻길로 감영 앞까지 그리고 영천 쪽으로 휘돌았다. 입관을 앞두고 마지막 선생의 얼굴을 대하려는 조문객으로 이날의 경교장은 더 한층 혼잡응ㄹ 이루었다. 늘어선 조문객들 속엔 세시간이나 길에서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이 혼잡을 완화시키려는지 장의위원회는 조문객의 시간 배정을 발표하였다. 때마침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4시 선생의 유해가 누워계신 빈소에는 거상을 입은 상주 내외를 비롯, 김규식, 조소앙,조완구,엄항섭씨 등 선생의 생전ㅇ으이 동지들과 정부대표측 이 국무총리 등이 건을 쓰고 늘어선 가운데 염습이 시작되었다.
넓지 못한 빈소에는 측근자 정부요인 사진반 신문기자들이 빈틈없이 들어찼고 기념영화촬영으로 인한 조명의 각광이 이따금씩 명멸할 뿐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분향도 그윽히 선생의 시신은 수의에 쌓여갔다. 방안의 사람들은 물론 방 밖에서도 유리창 너머로
보이지도 않은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군중속에선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곡성만이 내리는 비와 함께 애처로웠다.
수의는 끝났다. 이어5시 40분 입관식은 시작되었다. "달빛보다 밝은 천당...."
입관식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와 함께 경교장 안에 군중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여 선생의 명복을 축원하며 복받쳐올라오는 울음응ㄹ 제어할바 몰라 바로 그 시각부터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목놓아 통곡하였다.
선생은 가시었다.
"그 자리를 맡으셔서 힘을 다하시고, 민족국가를 위하여 잃은 동지오니 하느님께서 뜻을, 아름다운 꽃과 실상있는 열매를 맺게 하여주소서"
눈물어린 목소리로 김규식 박사는 기도를 올리었다.
5시 55분. 입관은 끝났다.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던 선생의 비원응ㄹ 애송하듯 줄대어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영결 이틀 앞둔 경교장 (제8일)
경교장의 추색은 (가을색)은 바야흐로 짙어갔다. 조문객은 한결같이 그칠 사이가 없다. 나머진 아동들의 순진하고도 애처로운 모양엔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그마한 땀 적신 손에 선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일금 50원의 봉투를 내어놓는가 하면 종이에 싸고 또 싼 초 한가락을 가져오는 소년이 있었다.
묵묵히 누워계신 선생께서는 몇 만원 몇 십만원의 조위금보다 이것을 얼마나 갸륵하다고 하실것인가.
그러나 인간 김구 선생은 이제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들려주실 수 없다. 유해를 모시고 있는 것 그나마도 앞으로 이틀뿐.
(사진 :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 선생 묘역)
장의 위원회의 준비는 본계단으로 들어섰다. 마이크를 통한 조가방송 또는 영어대의 연습 장례마련으로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그중에 남유달리 애수에 잠긴 부인이 있었다. 이봉창 의사의 질녀姪女(조카딸) 이은임(42세) 여사이다. 일찍이 이 의사가 의거하기 전 백범 선생에게 만일 환국하시면 유가족으로 질녀가 하나 있으니 만나봐 달라고 하였으나 해방 후 귀국하신 선생이 팔방으로 찾아도 이내 찾지 못하다 처음으로 선생을 뵌 것은 서거 하시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때 선생은 "다른 사람과 달라 고독한 처지에 있는 너를 돌보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앞으로는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거든 나하고 의논하자 그렇지만 무슨 기쁠일이 있겠느냐" 하셨닥고. 이은임씨는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울어도 울어도 어찌하리. 선생의 가실 날은 다가오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국민장은 7월 5일, 9시 50분 경교장을 떠나 종로 사거리를 거쳐 서울 운동장에서 국민장을 거행하였습니다. 국군의 조포를 시작으로 국기경례, 애국가 봉창, 국민장 장의준비위원회와 식사와 약력보고, 합창단의 조가, 분향과 헌화,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조사에 이어 4시경 육군 장병의 조총소리를 끝으로 영결식을 마칩니다. 영구는 효창원으로 출발하여 오후 10시경 3천만 겨레가 슬퍼하는 가운데 영원한 안식처인 효창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을 총으로 쏴 암살한 안두희. 그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선생님, 그러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암살범으로 아주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저역시 꼬꼬무를 통해 최대한 안두희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조금이나마 더 쉽게 접근하며 정보를 알게되었습니다. 꼬꼬무는 이런면에서 근현대사의 한국 역사를 참으로 재밌게 풀어 이야기해주는 방송이라는것을 좀더 실감하게 됩니다.
방송에서도 나온 것과 같이 1965년 12월, 곽태영씨가 당시 안두희가 사장으로있던 양구군 군납 업체 신의기업 내에 돌 1개를 들고 침입하여
안두희의 머리를 때리고 재크 나이프로 목과 머리 등을 찌르는 등으로 중상을 입힌적이 있고난 후,
1996년 , 평소 김구선생님을 매우 존경했던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기사 박기서씨(당시나이 49세) 가
인천 중구 신흥동의 안두희 집으로 찾아가 몽둥이를 휘둘러 안두희는 80세의 나이에 그렇게 피살되어 세상을 뜨게 됩니다.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를 응징할 기회를 노렸다" 라고 이야기한것으로 전해졌는데요. 박기서씨는 1997년 이러한 범행 동기가 정상 참작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98년 3.1절 특별사면이 있은 직후인 3월 13일 석방되었습니다.
안두희의 암살 배후는 문서등으로 밝혀진것은 없지만, 국회 보고서에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부차원의 음모가 있었라고 기록되어있다고하죠 .
비록 쫓는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했고, 사실을 이야기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가 사실은... 이라며 밝힌 이야기들을 이후 번복하게되고 그뒤로는 꼭꼭 숨기며 입을 닫는 모습을 보고 정말 화가나고 기가 찼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얻는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후 여러번의 길거리 테러도 당하고, 정부에게 버림받아 신변을 보호받지도 못학고, 그의 정체를 알고 이혼한 부인과 가족들은 다른 나라로 떠나거나, 출국금지로 출국도 못하고, 차라리 어차피 이승만 정부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것이라면 김구선생님이 왜 그렇게 목숨을 다하셔야했는지 진실이라도 밝힐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보호하려고 자신은 해가 되는 일은 당하기 싫어 진실을 이야기하지도 못하면서, 이야기를 한 뒤에도 번복하면서 왜그렇게 고귀한 한 사람의 생명은 그리 앗아갔는지.
그는 그렇게 죽고 난 뒤에도 안타까운 운명인것이고 그것은 그가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라는것.
임시정부요인 숙소
김구 선생님의 서재로 진입 하기 전, 큼지막한 다다미방이 보입니다. 1945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수행원들이 환국하여 머문 곳으로써, 2층으로 올라와 가장 안쪽인 김구 선생님의 침실쪽으로 들어가는 방향에 보이는 다다미 공간. 일본식 장마루 복도 이외에는 이렇게 숙소쪽 역시 다다미 방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일본식 목조 가옥이 느껴지네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담긴 사진들을 천천히 둘러복고, 최대한 한국어 한글자한글자를 소리내어 읽어보는 남편.
남편역시 일본에서 살아오며 역사에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었고, 또 그로인한 인식의 차이로부터 오는 의견차이에 수번을 다투기도 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한국에 있는동안 나를 한국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는 곳에 데려가줘"라고 남편으로부터 부탁아닌 부탁을 받았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 수개월동안, 조금이나마 한국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해 .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에대한 기록이 최대한 남아있는 곳을 방문하며 그에게 우리나라의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공유하게되었습니다.
해외에서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과의 교류의 시간이 많았던 남편.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남편, 나와같이 억울함을 싫어하고 진실된것들에 큰 관심을 보이는 민주주의파 남편. 그에게 한국인 아내로써 조금씩 한국의 역사를 전파하고 또 나역시 모르는 부분을 우리함께 배우자, 의 시각으로 같이 걸어가는 시간 속에서도 역시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
광화문에서 함께 촛불을 들었던 시간들, 한국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남편을 보며 종종 , 여러가지 질문을 받게됩니다.
우린 한일커플인데 역사이야기는 입밖에 꺼내지도 못한다. 혹은, 그렇게해서 얻는게 뭔가요? 왜 굳이 일본인 남편이 껄끄러워 할지도 모르는데요" 라면서 말입니다.
답변은 심플합니다. 둘의 이야기는 둘이 맞춰가게되고, 무엇보다 남편 스스로가 일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타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관심을 먼저 두는 사람이 얻는것이 많습니다. ⠀ ⠀⠀⠀⠀⠀⠀⠀
뒤늦게 사진으로나마 이날현장의 남편의 뒷모습을 보니 무척 고맙고. 또 미안하네요.
이곳은 2층의 건축 원형 전시실이었어요. 백범 김구 선생님의 서재와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공간이자, 건물의 가장 안쪽 모서리 부분이었습니다. 문을 열자, 다른 공간과는 또다른 의미로 느낌이 달랐습니다. 무척 쌀쌀했던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방문을 열자 좀더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오는 그곳엔 유리로 보호되어있는 유리벽 건너로 무척 오래되어보이는 건물의 벽면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임시정부 당시 욕실로 사용되었던 공간이었다고 하는데요, 벽체, 바닥(타일), 천정, 창문 등이 건축 당시의 원형 그 모습 그대로 생각보다 보존이 잘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김구 선생님의 침실쪽 건물 벽면 모서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거하신 창가쪽의 반대방향)
아무래도 조금씩 재현해가면서 새로 지어낸 표면보다는 이렇게 그때 그당시의 벽면을 보는것으로부터 역사가 더 소름돋게 전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역사공부를 한다는 것, 역사적인 현장에 방문하여 시간이 오래 지나 후손의 한사람으로서 그때의 그 시간으로 잠시 돌아가 공부를 해본다는것. 정말로 의미있는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농담반 진담반처럼 하시는 말씀. 바로 역사를 한번 알기 시작하고 한번 배우기 시작하고 재미를 붙이면 끝이 없다. 라는 말입니니다.
2층 계단 끝자락 정면에 마주할 수 있던 작은 방. 오토마타 체험실이 있었습니다. 이 방은 1948년 김구선생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한길에 올랐을때에 수행비서로 동행하고, 김구선생이 경교장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좌측근에서 보좌하셨던 당시 임시정부 비서 "선우진"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한 공간입니다.
6명이 들어가도 조금 불편했던 방 (모형 박스 이외의 공간기준) , 눈앞에 보이는 인형들의 회의 모습은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결정에 따라 개최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1945년 12월 28일)의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쳐 인형들 이었습니다. 앞의 버튼을 눌렀을때에 그들은 리얼하게 조금씩 움직이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1945년 1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의 외상회의에서 한국의 즉각적 독립이 아닌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는데요. 이 사실이 28일 국내에 전해지자 임시정부는 긴급하게 국무위원회를 소집하였고. 그리고 밤샘 회의를 통해 단순히 신탁통치 안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서 제 2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하였습니다.
2층 한켠에 마련된 응접실(서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후 김구 주석과 국내 정당대표들과의 회담 및 국무위원회가 개최되었던 곳입니다.
우측에 큰 테이블과 의자의 모습으로, 이곳은 김구 선생님의 자리였다라는것을 직감할 수 있었어요. 멋진 미소로 찍으신 사진이 참 인상깊었습니다.
나무 바닥의 결, 큼지막한 창문 그리고 요즘엔 보기드문 커튼의 색감까지, 어느 한곳 세세하게 과거로 돌아가지 않은 기분이 드는 곳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앉아있지않은 소파, 의자들. 잠시나마 이곳에 서서 김구 선생님이 앉아계신 모습을, 사람들과 회의하는 모습등을 상상해봅니다.
어느 벽면에 있었던 공간. 바로 덤웨이터라고합니다.
덤웨이터는 일종의 작은 엘레베이터인데요, 임시정부 당시 이곳은 음식을 조리하던 주방이 있었는데, 조리된 음식을 덤웨이터를 통해 1층 식당으로 올려보냈다곤해요.
다시 경교장 1층으로 돌아가볼게요.
1층의 응접실
국무위원회 등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회의들이 개최되고, 김구 주석이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했던 곳입니다.
경교장에 진입하여 넓은 홀의 좌측 복도쪽에 위치하고 있어요.
"환국 이후 첫번째 국무위원회가 개최되다"
1945년 12월 3일, 중국에서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들은 이곳에서 국무위원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국무위원회는 임시정부의 정책을 결정하고 심의하는 기구였습니다. 이날의 회의는 김구 주석 주재 하에 그간 수집된 국내 동향을 보고 받고, 임시정부의 앞으로의 활동 방향과 과제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남과 북의 역량을 단결하여 자주 통일의 구체안을 완성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는 이곳과 2층 응접실에서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아래층 응접실을 국무회의 장소로 꾸미느라고 경교장은 분주했다. 낮 3시, 상상외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보도진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외기자들이 큼지막한 사진기들을 치켜들고 몰려들었다.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가 개최되는 것이다.(중략)
김구 주석이 주재를 하였고 자리를 고쳐 앉는 각료들의 숨소리가 커져갔다.
개회사에 이어 김구 주석은 현재 상태의 유동적인 국내 상황을 잠깐 부연하였다.
이자리에 구미위원단의 단장이라는 직책을 가졌던 자격으로 참석한 이 박사는 그동안 임정이 조심스럽게 취한 태도 등의 경과 보고를곰곰이 듣꼬 있었다.
-장준하 "돌벡개" 중에서-
작은 탁자위에 세워진 사진속 모습과 제 두눈으로 보고있는 공간이 오버랩되며
현실감이 없어지는 느낌입니다. 바로 사진속의 공간에 그 시간들로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1층의 귀빈식당. 1945년 12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공식 만찬이 개최된 공간이기도 하며 중요한 손님들이 왔을때에 식사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북측은 현재도 존재하는 병원의 응급실과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창문을 복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홀의 우측 벽면 부분이었을까요.
또한 이곳 귀빈 식당은 김구선생님의 서거 당시 빈소가 마련되기도 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경교장 1층 우측에 있는 선전부 사무실,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 임시정부의 홍보 및 언론관계를 담당했던 선전부가 활동하던 곳입니다.
건립 당시에는 당구실로 사용되었다라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선전부 사무실에서는 정부의 이념과 정책을 국내외에 홍보하는 업무를 수행했던 곳인데요, 벨벳의 고전적인 색감과 패턴의 소파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당시의 그 때의 모습을 정말 잘 살려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1층과 2층을 다 둘러보는데에 저희는 1시간 넘게 걸렸던 것 같습니다. 대충 귀찮듯이 훓어보는일은 이곳에선 없을겁니다. 저희가 나갈때즈음에는 많은 학생 친구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방문했어요. 이 친구들에게도 책으로만 배운 김구선생님에 대해 그 현장에서 좀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임시정부 주석이셨던 김구 선생님께서 생의 마지막까지 살아계셨던 곳을 진지하게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갔을때엔 워낙 장난치고 기물 파손까지 하는 친구들을 봐서 쓸데없는 걱정이 들더라구요.
바깥에서 찍어도 분명하게 보이던 그날의 총자국. 이곳에 다녀온 뒤로, 저는 주변 친국들에게 경교장에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같이 서울에서 태어나 나고자란 친구들인데도 김구 선생님의 존재는 뼈절이게 알면서도 김구 선생님이 서거하신 장소인 경교장이 바로 우리네들 코앞에 , 또 네들이 다니는 병원 안에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하니 모두 깜짝 놀라더군요.
아마도 최근 많은 분들께 사랑받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경교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루고 또 그것이 알고싶다 다시보기에서도 김구선생님의 암살에 대해서 다뤘으니, 요 몇일 사이에도 관심을 갖고있는 지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중요한 공간에 다녀왔으면서도 게으름으로 이날의 후기를 포스팅 하지 않았던 제가 뒤늦게나마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보시고 또 다녀오실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하게 됩니다.
분명 이 건물을 들어서시는 순간, 수십년 전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시게 될 것 입니다. 참고로 바로 옆에는 경찰 박물관과 돈의문 박물관 마을 등 기타 볼거리들이 가득입니다. 특히 돈의문 박물관마을 역시 이번 경교장을 다녀오면서 처음 알게된 곳인데요 예쁘게 단장하여 오픈한 마을이라 한국의 전통 모습과 재밌는 볼거리들이 많습니다. 이미 2년여전의 후기입니다만 많이 변화하진 않았을것이라고 판단되어 다음 포스팅으로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인 남편이 경찰 박물관에서 아주 재밌고 행복해했거든요 (웃음)
아직도 저는 김구 선생님의 인생에 대해서 그 역사의 행보에 대해서 자세히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할때에 줄줄 읊을 수 있는 수준이 되진 않지만, 제가 살고있는 곳에서 방문하고있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의 역사와 또 자연스럽게 이어지게되는 윤봉길 의사와 더 낭아가 가나자와의 과거 지형 까지, 또 내가 몰랐던 우리나라 역사. 내가 오늘날 태어날 수 있었던 것 역시 선조들 덕분이라는 생각을 그 감사함을 잊지않고 살아가는것이 , 제가 할수있는 제가 해갈 수 있는 보답이자 당연히 해야할 후손들의 자세라고 생각하게됩니다.
남편은 앞으로 하늘문이 다시 열리게되면 , 광주에 가보고싶다고해요. 한국에 가지 못한 기간동안 남편은 광주에대한 많은 영상물들을 마주했거든요. 강풀씨의 웹툰을 모티브로한 (광주5.18) 26년이라는 영화를 뒤늦게 보게되었습니다. 총자국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그날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5.18광주 민주화운동 기록관에 가보고싶다고하네요. 저역시 영화로만 만나는것이 아닌, 그장소에 직접 방문해 또한번의 마음의 뭉클함과함께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지난날 한국의 역사를 또한번 제대로 배우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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